아이를 키우다보니 체력은 떨어지고 바닥난 체력은 나의 다정함도 가져가버렸다. 짜증이 올라올 때가 많았고,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그래서 40살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그 장소는 아이들이 다니던 도장의 성인부 운동이었다. 처음 시작은 근력을 키우기 위한 거였는데, 의도치 않게 태권도를 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지금 내나이 51세.
10년간 태권도를 해왔지만 나는 여전히 '몸치'다.
평생 하체가 튼튼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품새를 할 때는 중심을 잃어 휘청거릴 때가 많고, 절도 있어야 할 손동작은 어설펐으며, 힘주는 방법도 아직 감이 안 온다.
물론 모든 성인부가 나 같지는 않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근력이 좋고 발차기도 하늘을 뚫을 듯 힘차고 드높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자신감과 즐거움이 겹쳐 더 빛나 보인다. 저주받은 내 다리는 잘 펴지지도 않는다. 비엔나 소세지도 아니고 원~ 이런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도장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한 듯 잘 웃는다. 속도 없이. 그리고 그런 마음이기에 뭔가를 노력하거나 시도하기보다 핑계를 만들어 도망갈 구실을 찾는다. 원래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거나 마음먹으면 절대 도망가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다. 하지만 도장에서는 늘 예외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래도 관장님은 내게 권유했다.
"선생님, 이번에 거제도에서 대회가 있는데, 성인부 첫 대회가 열려요.
한 번 나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나는 망설였지만 다 함께 도전해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성인부 모두가 참가를 결정했다. 종목은 개인품새와 단체태권품새.
하지만 선택이 잘못되었을까? 내가 신중하지 못했던 탓일까?
바쁜 일정과 다가오는 대회 일정은 많은 부담을 가져왔다. 남들은 또 왜 그렇게 열심히 하고, 즐거워 보이는지 그들에 대한 질투심은 내 기분을 자꾸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답은 내 스스로 알고 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내 자신만 보면 될 거라는 걸. 그 뻔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꼬여버린 실처럼 복잡해져갔다.
포기하고도 싶어 몇 번 언급해보았지만 웃음과 응대멘트 같은 같은 말을 반복하던 우리 관장님은 포기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드디어 내일이 디데이.
전날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 나이쯤 되니 전조증상이 오면 다음날 무엇이 어떻게 내 몸을 괴롭힐지 감이 온다. 감기몸살이 오면 그 다음엔 안압이 오른다. 그래서 미리 약을 먹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했다.
대회 당일, 맙소사 감기몸살이 찾아왔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비는 왜 그렇게 퍼부어대는지 도장까지 이동할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정말 날씨까지 야속했다. 더 이상 몸이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 빈속에 진통제를 먹고 경기장에 섰지만, 몸은 무겁고 머리는 몽롱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미간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대기 시간에 옷이 흠뻑 젖도록 연습을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눈치없는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대회장에 들어서자 내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나는 이 대회 최초 성인부 '1번' 참가자이자, 50대 최고령 선수였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태권도는 여성 성인부가 많지 않은 탓이다.
나의 상대는 다른 태권도장의 24살 여성참가자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엄마는 나보다 두 살 어렸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특별히 주최측에서는 성인부 첫 경기를 위해 메인 무대까지 내어주시고 격려와 응원의 박수까지 보내주셨다. 엄청 뿌듯하고 영광스러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그 관심과 주목됨이 부담스러웠다.
드디어
경기 시작.
긴장되고 몽롱한 몸으로 품새를 했지만 연습때와 달리 힘도 덜 들어가고, 동작도 엉성했다.
그 와중에 관중석에서 들려온 박수 소리와 응원은 위축된 내 마음을 조금씩 다독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과는
당연히 ~졌다.
그러나 속상하다거나 아쉽지는 않다. 하지만 창피함은 있었다. 나의 첫 대회 도전기는 나의 흑역사에 한 줄 추가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욕심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기에 잘하는 이들을 보면 부럽고, 못하는 나를 보면 창피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 안에서 함께 오는 걱정, 질투, 좌절, 고뇌까지 감내하면서 말이다.
원래 영화라면 난 흘린 땀 만큼 변화되어 백조를 이긴 멋진 오리새끼가 되어 찬사를 받아야마땅하나 현실은 냉정하다.
내가 '몸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변화된 오리새끼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스트레스에 지쳐 도장에서 도망쳤겠지만, 이번엔 끝까지 버텼다.
그러니 전혀 쓸모없는 도전은 아니다.
그리고 대회 준비하는 동안 다른 성인부 참가자들을 보며 질투심도 느꼈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동작을 펼쳤고, 당당함으로 빛났다. 단체 품새에 참가한 그들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즐겁고 화기애애한 모습은 더욱 부러웠다.
'나도 저들처럼 즐길 수 있을까?'
몇 번을 생각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오"였다.
대회가 끝난 그 날 나는 그 기억들을 지우고 싶었다.
'내가 왜 그렇게 못했을까…'하는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떨림과 부족함, 몽롱했던 몸 상태까지도 내 성장의 기록이었다.
내가 이번 태권도 도전을 시작하며 가장 힘들 때, 2년 전에 읽었던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다시 펼쳐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의 내 마음에 더 깊게 와 닿았다.
이 책은 지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삶의 무거운 때를 벗겨내는 법을 이야기한다. 스스로 사람들은 선택한다. 아픈 기억을 지울 것인지, 얼룩이라도 일부를 남길 것인지, 아님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자신의 인생 기록으로 남겨 스스로 성장해나갈 것인지.
대회 도전을 준비하며 겪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남을 보며 느꼈던 질투와 불안까지,
모두 내 마음에 묵은 때였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흑역사가 된 첫 대회를 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대회는 나에게 성장의 기록이었을까? 아닌 지우고 싶은 아픈 기억이었을까?
"첫 대회의 흑역사, 나는 절대 지우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나의 성장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도복을 입고, 책에서 배운 마음의 세탁법을 떠올리며 도장 문을 연다.
도망가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나의 도전기를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한 조각이 될 테니까 말이다.
여전히 몸치인 나는 발도 잘 안 맞고, 동작도 어설프다.
하지만 '보는 눈'만큼은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도장 안에서, 대회장에서, 내 눈은 다른 사람들의 동작을 꿰뚫으며 그들을 질투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가끔 좌절하겠지만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이런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게 한 일등공신,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를 무턱대고 무모한 도전에 끌어낸 관장님이다.
잘 하실 수 있다고 응원해주시면서 대회를 권할 때는 관장님 말에 반신반의했었다.
"대회? 나 같은 몸치가? 정말 괜찮을까?"
또 어느날은 속으로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왜 하필 나야, 몸도 안 좋은데…"
하지만, 관장님은 늘 묵묵히 믿어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투덜거림 뒤엔 감사가 가득하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상상도 못한 도전을 시작했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준비과정 내내 관장님은 늘 같은 말만 하셨다.
"항상 응원합니다."
진짜 앵무새 같았다.
마치 응대멘트라도 복사해놓고 붙여넣기해서 쓰시는 것 같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반복하는 그 한마디.
처음에는 그 말이 식상하고, 심지어 '아, 또 그 말이야…' 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제 좀 다른 말도 해주세요, 관장님…" 목까지 올라왔으나 삼켰던 말.
하지만 알고 보니,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인지.
관장님이 건넨 그 짧은 한 마디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주는 밧줄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속으로 '관장님, 앵무새 멘트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고마워요!'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단체 품새 팀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웃는 그 날을 꿈꾸며.
성인부 1번, 최고령, 그리고 몸치 아줌마의 첫 도전은 지금 이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도전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2년전, 그리고 지금 나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 준 책. 실패로 얼룩진 마음도, 질투와 비교로 지친 나의 내면의 상처도 차분하게 헹구고 말려주어 얼룩을 없애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충고나 조언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면서 함께 헤쳐나갈 힘을 준다. 삶이 조금 구겨졌을 때, 나답게 살고 싶은 데 자꾸 흔들릴 때,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가 다정히 손 내밀어 줄 것이다. 후속작으로 나온 사진관과 식물원도 궁금해져서 오늘부터는 그 책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다들 같이 보실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