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행복한 만남이 있는 곳 진천군립도서관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힌 아름다운 청년 어린 소녀들이 빛도 들지 않는 먼지 구덩이 작업실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턱없이 적은 돈을 받는 것을 보고, 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기어이 목숨까지 바친 청년 전태일. 그가 태어난 1948년은 광복을 맞이한 지 3년째 되는 해로, 사회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사기꾼들도 많았다. 재봉 일을 하는 아버지 전상수 역시 그런 사기꾼에게 수차례 사기를 당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전태일은 어릴 적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늘 술을 마시고 주정을 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로 인해 심신이 고달파 몸이 자주 아팠다. 어쩔 수 없이 전태일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동생과 신문팔이, 구두닦이, 위탁 판매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집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순탄치 않은 상황에 포기해야만 했다. 이런 고단한 삶을 살던 전태일은 1965년, 평화 시장 봉제 공장에 수습공으로 취직했는데 이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작업 환경이 너무도 열악했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먼지 구덩이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허리 한 번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일이 많은 날은 업주들이 각성제까지 먹여 가며 일을 시켰다. 전태일은 이러한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중 근로 기준법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곧 근로 기준법을 열심히 익힌 뒤 바보회, 삼동 친목회 등의 모임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노동 운동을 시작했지만 정부는 이들을 방해했다.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때 그는 큰 결심을 했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끝나는 싸움이라는 걸 깨달은 전태일은 노동자들과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진행하기로 한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 수많은 대학생이 그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섰고, 학교와 종교 단체에서는 그의 추모식을 열었다. 이렇게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뒤 평화 시장에는 정식 노동조합이 생겼고, 본격적인 노동 운동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작은 영혼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의지는 꿈과 희망이 되어 지금까지도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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